'동남아시아 1등' 유니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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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할 때는 고젝(Gojek)을 불러요. 거의 매일 사용하죠. 차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아요. 차비를 미리 알려주니 기사랑 실랑이할 일도 없고요. 출근하면 매일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 마시는데 항상 오보(OVO)로 결제해요. 현금이 없어도 간편하니까요. 물건을 살 일이 있으면 당연히 토코페디아(Tokopedia)를 이용하죠. 보안 시스템 덕에 믿을 수 있어요. 트라벨로카(Traveloka)는 휴가 갈 때 비행기표, 호텔 숙박 할인 받으려고 꼭 썼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엔 사실 쓸 일이 없네요. 이용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러고 보니 부칼라팍(Bukalapak)은 토코페디아랑 비슷해서 안 쓰게 되네요.”
무역회사에 다니는 안니사(24)씨가 생필품으로 꼽은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앱) 5개다. 없으면 못 살 지경이다. 마케팅 매니저 비비(36)씨는 “언제 어디서나 쉽고 빠르게 원하는 일을 실용적으로 돕는 요술램프 지니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한국일보 인터뷰에 응한 현지인들의 전언은 엇비슷하다. 인도네시아에서 좀 살았다는 이방인들도 최소 한두 개는 써 봤거나 애용한다. 현지 생활 적응 단계를 가늠하는 잣대다. 기자 역시 4개를 이용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유니콘의 나라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트에 따르면 3월 기준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 이상 기업(5개)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다. 동남아 10개국 중 유니콘 보유국은 싱가포르(3개), 필리핀(1개)을 더해 세 곳뿐이다. 앞서 언급한 앱이 모두 유니콘이다. 2억7,000만 인구의 45%가 24세 이하, 평균 연령 29세인 청년 국가의 역동성이 일군 성취다. 5개 중 4곳의 창업자가 1980년대생으로 모두 20대에 사업에 뛰어들었다.
유니콘을 꿈꾸는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은 2,220개로 미국 인도 영국 캐나다에 이어 세계 5위다. 38위인 한국(330개)의 6.7배다. 창업부터 유니콘 등극까지 평균 6.6년이 걸린 걸 감안하면 유니콘 숫자도 한국(11개)을 따라잡을 기세다. 지난해 상반기 동남아 자본의 74%(28억 달러)가 인도네시아 스타트업에 투자됐다. 정부는 국가 부흥의 선봉으로 스타트업 육성을 내걸고 있다. 세계은행의 구매력 평가 조사에서 인도네시아는 세계 10위다.
인도네시아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약점과 위기를 오히려 장점과 기회로 바꾸면서 구축됐다. 높은 빈부 및 지역 격차, 열악한 제조업 기반을 디지털 경제로 극복했다. 예컨대 대중교통 부족과 물류 낙후는 1억 대가 넘는 오토바이 중심 승차공유 및 배달로, 국민의 75%가 제도권 금융을 이용할 수 없는 현실은 핀테크(금융+기술)로 메우는 전략이다. 세계 4위 인구 대국 토양에 뿌리내린 내수시장 선점, 대규모 투자 유치도 주효했다. 분야별 유니콘을 살펴본다.
① 만능 앱-고젝
초창기 20여 명이던 오토바이택시 기사들은 현재 2,000만 명이 넘는다.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기사들 삶의 질이 이전보다 향상됐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교통, 물류를 넘어 결제, 뉴스, 오락, 건강, 쇼핑, 음식, 공유주방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하면서 ‘만능 슈퍼앱’으로 진화하고 있다. 덕분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성장세다. 베트남, 태국, 싱가포르에 진출했고 말레이시아, 필리핀 공략을 앞두고 있다.
② 전자상거래-토코페디아, 부칼라팍
토코페디아는 현재 최고경영자(CEO)인 윌리엄 타누위자야(40)가 2009년 만들었다. 시골의 공장 노동자 아들로 태어난 윌리엄은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하루의 절반을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정도로 가난했으나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하면서 사업을 구상한 뒤 친구와 함께 창업했다.
처음엔 부진했지만 빠른 스마트폰 보급률, 오토바이 배송 덕분에 성장을 거듭하며 ‘인도네시아의 알리바바’라 불리게 됐다. 이어 소프트뱅크그룹, 알리바바 등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20억 달러(2조4,000억 원)를 지원받으면서 2016년 유니콘에 등극했다. 2019년 홍보대사로 발탁한 방탄소년단(BTS) 덕을 톡톡히 누렸다. 현재 월 사용자만 1억 명이 넘고, 누구나 될 수 있는 판매자는 990만 명 이상이다. 최근엔 고젝과의 합병 설이 계속 오르내리고 있다. 양사는 공식 부인하고 있다.
부칼라팍은 2010년 반둥공과대(ITB) 학생 아흐마드 자키(35)가 친구들과 하숙집에서 만들었다. 당시 돈이 없어 100개 인터넷주소(도메인) 중에 가장 싼 걸 고른 게 8만 루피아(6,300원)짜리 부칼라팍(’상점을 열다’는 뜻)이다. 토종 중소기업 제품 판매에 주력했지만 사업을 그만둘까 고민했을 정도로 고전했다. 소상공인들의 지지와 투자 유치 성공에 힘입어 2017년 유니콘에 이름을 올렸다. 현지 전자상거래 시장을 양분한 토코페디아와 부칼라팍은 최근 싱가포르 업체 쇼피의 할인 및 판촉 공세로 각각 점유율 2, 3위로 떨어졌다.
하버드대 석사 과정에 있던 페리 우나르디(33)가 2012년 항공권 가격 검색 및 비교 사이트로 시작했다. 설립 1년 뒤 인도네시아에 여행 바람이 불면서 예약 사이트로 개편했다. 항공편 및 호텔 예약, 버스 기차 렌터카 같은 교통수단 연계, 관광 묶음 상품 등 맞춤형 일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앱은 6,000만 번 이상 다운로드가 됐다. 20만 개가 넘는 운항 노선, 40개 이상의 결제 방법, 저렴한 가격, 고객 모국어 제공 서비스 등으로 동남아에서 인기를 얻어 2017년 유니콘 반열에 들었다. 이듬해 페리는 인도네시아 최연소 갑부에 올랐다. 코로나19 사태의 타격을 받고 있으나 가상 여행, 여행 정보 제공 등으로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현지 대기업 리포그룹이 만든 후발 주자지만 토코페디아 등 기존 유니콘과의 협업을 통해 서비스 개시 3년 만인 2019년 유니콘 자격을 얻었다. 같은 해 인도네시아 전자화폐 시장의 20%를 점유하며 ‘지갑 없는 세상’을 이끌고 있다. 405개 도시에서 사용할 수 있다.
⑤ 차기 유니콘은
원격의료와 온라인교육 분야가 유니콘 후보로 꼽힌다. 2016년 설립된 할로독(Halodoc)은 2만2,000명이 넘는 의사, 85개 도시 1,800개 약국과 협력하고 있는 1등 원격의료업체다. 병원 비교 등 특화 서비스가 눈에 띄는 알로독테르(Alodokter)도 거론된다.
2014년 설립된 루앙구루(Ruangguruㆍ교무실)는 2,200만 회원을 거느린 온라인교육의 선두 주자다. 전체 이용자 96%가 3개월 내에 성적이 올랐고, 고교생 회원 69%가 국립대에 합격했다는 게 루앙구루의 주장이다. 나라 안팎에서 여러 혁신 관련 상을 받으며 투자를 끌어내고 있다. 전자결제업체 크레디보(Kredivo)도 차기 유니콘 1순위다.
이창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자카르타 무역관 부관장은 “인터넷이 안 되는 마을이 전체의 약 15%인 1만2,000여 개일 정도로 여전한 디지털 격차와 1만7,000여 개 섬으로 이뤄진 광대한 도서 국가의 취약한 물류 기반은 풀어야 할 숙제”라면서도 “인터넷 보급률이 빠르게 늘고 있고 물류 산업도 발전이 예상되는 만큼 우리에겐 기회의 땅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자카르타= 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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